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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전반부가 두 남녀의 군산 기행이라면, 후반부는 신촌(서울)기행이다. 영화의 중반을 넘어서면 관객은 알게 된다. 후반부의 이야기가 시간상 전반부의 이야기를 선행한다는 것을. 영화 제목 크레딧도 서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에서야 뜬다. 마치 이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는 의미처럼. 무슨 의도일까.
“실제 영화를 찍을 때도 순서대로 찍지 않는다. 영화란 편집까지 마쳐야 완성이 되는 거다. 어쩌면 영화는 사실이 아니라 기억을 찍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억이 사실의 순서대로 가지만은 않는다. 이 영화는 어떤 순서가 맞을까 생각해봤다. 보통의 영화들은 시작과 결말을 중시하고 중간을 중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실제는 중간까지는 와야 앞과 뒤가 보이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 삶을 중간 지점에서 바라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군산’은 전직 시인 윤영(박해일)과 그가 좋아하는 이혼녀 송현(문소리)의 군산 이몽(異夢)에 관한 이야기다. 술김에 두 사람은 군산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일본풍 민박집에 묵는다. 송현이 과묵한 민박집 사장(정진영)에게 관심을 보이자, 윤영은 자신의 곁을 맴도는 민박집 사장 딸(박소담)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한다.
영화를 연출한 장률 감독은 당초 전라남도 목포에서 영화를 찍으려고 했다. 그러나 촬영 여건이 맞지 않아 군산에서 영화를 찍게 됐다. 두 도시 모두 일본풍이 남아있는 고즈넉한 도시다. 장률 감독은 군산의 첫인상에 대해 “촬영하기 전 두 번 헌팅을 갔다. 이 집 들어가도 좋고, 저 집 들어가도 좋고, 모든 공간이 좋았다. 군산은 연애가 잘 이뤄지는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장률 감독은 전작의 주무대였던 경주에 대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도시라고 말한 바 있다. 군산에서는 연애라는 키워드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전반부에 해당하는 군산 기행은 윤영(박해일)과 송현(문소리), 이 사장(정진영), 주은(박소담)의 알듯 모를 듯한 감정이 교차한다. 물론 그 감정은 남녀 간의 연정만은 아니다. 설렘과 외로움, 그리움 등 다양한 감정이 인물과 인물을 타고 흐른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당장 군산으로 떠나고픈 충동을 느낄 수 있다. 허름한 동네 뒷골목부터 기차가 다니지 않은 낡은 철길, 쓸쓸한 바다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군산과는 또 다른 면모가 시, 청각적으로 유혹하는 느낌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실내외 공간은 모두 군산의 실제 하는 공간에서 촬영됐다.
중국 연변에서 나고 자란 재중 동포 2세인 장률 감독은 특정 지역의 공간과 시간에서 발견한 흔적과 정서의 리듬을 스크린에 옮기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왔다. ‘당시’의 베이징, ‘경계’의 몽골, ‘중경’의 충칭, ‘이리’의 이리, ‘두만강’의 두만강, ‘경주’의 경주, ‘춘몽’의 수색에 이르기까지 공간에서 심상을 떠올리는 식으로 시 같은 영화를 만들어왔다.
“공간이 주는 시간의 흔적에 의지를 한다. 점점 심해진다. 시간의 흔적이 있는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면 지금의 흔적과 섞이는데 아련함이 층층이 쌓이는 것 같다. 우리네 삶도, 일상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되게 순서 있는 척 이야기한다. 영화는 감정을 다루는 매체가 아닌가. 산업의 순서를 완전히 따르지 않아도 감정을 공유할 사람은 있을 것 같다.”
이번 영화에는 공간의 소리를 담는데도 많은 공을 들였다. 공간의 특징과 매력이 소리와 합쳐져 더욱 부각되는 느낌이 든다.
“사실 난 시각보다 소리를 더 중시한다. 사람의 감정은 소리로 훨씬 더 깊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 속에도 시각보다 소리가 훨씬 오래 남는다. 요즘 영화들은 시각적 자극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한데 영화는 시각과 청각의 합이어야 한다. 내가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디테일한 소리에 관심이 많다. 서울은 소리가 뒤엉켜있다. 군산에 가보니 소리의 순서가 보이는 느낌이었다. 가끔 그 순서가 깨질 때가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 전투기가 지나갈 때다.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영화를 찍을까도 생각했는데 그 또한 군산의 일상이라고 생각해 그대로 담았다.”
신촌으로 공간이 바뀌는 중반 이후에는 군산과는 다른 이야기가 등장한다. 국적과 정체성, 역사관에 관한 감독의 성찰이 캐릭터와 이야기에 반영돼있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그린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조선족 가정부와 조선족 노동자들의 시위 장면이 대표적이다.
장률 감독은 “조선족의 피해의식을 그리려고 한 게 아니다. 조선족이라고 하면 역사문제, 정치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나쁜 건 아니다. 그런데 그 면만 보면 소통이 안된다. 일상 속에서 비주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파출부나 식당 종업원 중에 조선족 사람이 많지 않나. 우리네 일상에 함께 하는데 시선을 주지 않는 부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 소통이 더 잘될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장률 감독은 ‘경주’, ‘필름 시대 사랑’에 이어 또 한 번 박해일과 호흡을 맞췄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지식인의 모습은 마치 장률 감독의 분신처럼 여겨질 정도다. 때론 아이 같고, 때론 애늙은이 같은 박해일의 매력은 장률 감독의 영화에서 유독 빛난다. 이번 영화도 그렇다.
“박해일 씨 같은 리듬 있는 사람이 더 제 눈에 들어온다. 시대의 흐름과 방향대로 쫓아가는 사람보다 시대의 흐름에 상관없이 자기 리듬을 가지고 있는 사람 말이다. 시대와 거리를 둔 리듬이 실제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하다. 시인 같은 사람을 우리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지 않나. 그러나 그건 이상한 게 아니라 어떻게든 자기 리듬대로 한 발씩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해일 씨는 저와 술을 마실 때마다 “감독님 이상한 사람 같아요”라고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그 사람이 더 그렇다.(웃음)”
이번 영화에는 수많은 카메오가 등장한다. 해병대 출신의 ‘윤영 아버지’ 역의 명계남, 칼국수집 사장 ‘백화’ 역의문숙, 윤영을 마땅해 하지 않은 송현의 ‘사촌 언니’ 역의 이미숙, 윤동주 시인의 먼 친척으로 밝혀진 연변 출신 ‘가사도우미’ 역의 김희정, 송현의 ‘전 남편’ 역의 윤제문, ‘전 남편의 여자친구’역의 정은채, 윤영에게 호의를 베푸는 ‘약사’ 역의 한예리를 만날 수 있다.
카메오가 많이 나오는 영화의 경우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연기 톤이 튀는 경우가 있지만 ‘군산’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마치 그 공간에 그 역할로 존재했던 사람들처럼 꼭 들어맞는다. 누구도 소비된다는 느낌 없이 생동감있는 연기를 펼쳤다.
‘군산’은 일관된 흐름의 스토리 라인을 가진 영화는 아니다. 그 때문에 영화의 의미와 맛을 곱씹을 수도 있지만, 질서를 세우고 이해를 하고자 하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박해일과 문소리의 발길을 따라 군산과 신촌이라는 공간의 미학과 청각의 다채로움을 생각 없이 즐기면 된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끼는 대로 보면 더욱 즐거운 영화다.
장률 감독은 연세대학교에서 6년간 강의를 해오다가 최근 교편을 내려놓았다. 자연스레 그의 주거지도 수색에서 베이징으로 옮겨졌다. 지난 6년간 한국에 머물며 6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 작품에는 누구도 영화적 공간으로 주목하지 않았던 경주, 수색, 군산이 등장했고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공간에서 영상시를 쓰는 장률 감독은 앞으로는 어떤 영화를 만들까.
그는 차기작에 대한 계획이 아직 서지 않았다고 했다. 또 어느 공간을 거닐며 시작(詩作)을 할지 궁금해진다.
(SBS funE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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