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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병사 박진(?∼1597)이 경주성 밑에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성 안으로 쐈다. 왜적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지 못하여 구경하고, 밀고 굴려보기도 했다. 갑자기 포가 폭발하여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서 흩어지니 즉사한 사람이 30여 명이나 됐다. (중략) 왜적들은 드디어 경주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의 전모를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에는 전쟁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짜릿한 전투장면이 나온다. 1592년 9월 왜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 휘하의 군사들에게 함락당한 경주성을 탈환한 대목이다. 이 전투뿐 아니다. 한산도대첩과 진주성대첩, 행주대첩까지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리를 거둔 주요한 전투의 배경에는 모두 비격진천뢰가 있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비밀병기 비격진천뢰가 전북 고창군 무장현 관아와 읍성(무장읍성·사적 제346호)에서 무더기로 발견됐다. 호남문화재연구원은 무장읍성 내부 동쪽 성벽 근처에서 비격진천뢰 11점을 비롯해 조선시대 훈련청과 군기고로 추정되는 건물지 등을 발견했다고 15일 밝혔다.
이날 무장읍성에서 공개된 비격진천뢰는 군기고로 사용된 건물의 수혈(竪穴·구덩이) 유적에 6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머지 5점은 주변 퇴적층에서 발견됐다. 크기는 지름 21cm에 무게는 17∼18kg이다. 겉모습은 볼링공과 비슷하지만 사용되지 않은 폭탄이어서 내부에 화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영덕 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은 “지금까지 발견된 비격진천뢰는 총 6점인데 모두 폭발이 일어난 후 탄피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며 “원형 그대로 묻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병기사(兵器史)에 획기적인 유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비격진천뢰가 출토된 구덩이 바로 옆에서는 실제로 포를 쏜 시설로 추정되는 포대(砲臺) 유적이 함께 발견됐다. 돌을 깔아 평탄면을 조성한 뒤 흙을 다졌고, 포를 거치하기 위해 뚫은 기둥구멍 2개도 확인됐다. 조선 후기의 병서 ‘융원필비(戎垣必備)’에는 “중완구(中碗口·화포)에 실어 발사하면 300보(약 360m)를 날아간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고문헌에 나와 있는 기록 그대로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 화포장(火砲匠) 이장손이 개발한 비격진천뢰는 조선의 독창적인 발명품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융원필비에 따르면 무쇠 속에 화약과 철 조각을 넣고, 오늘날 폭탄의 신관 역할을 하는 죽통(竹筒)을 넣었다. 폭발 시간을 조절하는 도화선을 감은 목곡(木谷)이 들어있어 시한폭탄과 같은 역할을 했다. 날아서 친다는 ‘비격(飛擊)’이라는 용어처럼 400∼500보(약 500∼600m)까지 날아가는 동안 폭발하지 않도록 한 비결이다. 중국에서도 진천뢰(震天雷)라는 이름의 무기가 개발된 적이 있지만 비격진천뢰처럼 폭발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는 죽통이 없어 직접 던져 터뜨리는 방법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다만 이번에 발견된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고종 시대의 포탄으로 추정된다. 무장읍성은 1894년 당시 전북 고창과 정읍지역을 중심으로 봉기했던 동학 농민군이 무력시위를 벌인 끝에 관군을 내쫓고, 점령한 곳이다. 윤덕향 호남문화재연구원장은 “19세기 양식의 조선기와도 함께 발견됐는데 당시 동학군의 위세에 눌린 관군이 읍성이 함락되기 전 포탄을 묻은 것으로 추정된다”며 “비격진천뢰가 1591년부터 300여 년간 조선 국방의 핵심적인 무기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고창=유원모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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